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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식인종에 대하여

라미뉴 2020. 3. 5. 12:45

 

저 문화가 없는 나라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여러 성과에는 우리의 취미로 보아서, 우리 것에 비해서 그 묘미와 맛까지도 탁월한 것이 있다. 인간의 기술이 우리의 위대하고 강력한 어머니인 대자연보다 나은 영광을 차지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말이다. 우리는 자연이 내놓은 작품의 풍부한 미를 우리가 꾸며 낸 기교로 너무 덮어쒸워서, 자연의 순진미를 전부 질식시켜 놓고 있다. 그렇지만 자연의 순진성이 빛나고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자연은 우리의 경박하고 헛된 기도들을 말 못할 수치 속에 묻히게 한다.

 

플라톤은 말한다."모든 사물들은 자연,우연,또는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자연과 우연에 의하며, 가장 못나고 불완전한 것은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몽테뉴수상록1.p.223]

인간사회가 그렇게도 인간적인 꾸며댐 없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거짓말,배반,은닉,탐욕,시기,비방,용서등을 의미하는 언어 자체를 들어 본 일 없는 고장이다. 그가 타이르는 말은 이 두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적에 대해서 용감히 싸워라. 자기 아내들에게 정답게 해 주라"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 하는 말로, 그들을 위해서 술을 맛있게 담그고 데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아내들이라는 점을 반드시 주의시켜서 감사한마음을 잊지 않게 한다. 그들에게는 제관이나 예언자 같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계획하는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언하며, 전쟁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를 판단한다. 그러나 만일 그의 예언한 바가 맞지 않거나 사건이 다르게 일어나면, 가짜 예언자로 지목되어 도끼에 맞아 천조각이 나서 죽는다는 조건으로 한다. 그 때문에 한 번 말을 잘못한 자는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점치는 법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때문에 속임수를 쓰는 것은 사기로 처벌받는다. 스키타이 족들 사이에는 점쟁이가 어쩌다 예언에 실패하면, 그의 손발을 쇠사슬에 묶어 가시덤불을 잔뜩 실은 수레 위에 뉘고 황소로 끌게 하여, 그 위에서 태워 죽인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을 다루는 자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니 용서받을 수 있다.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을 알아내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사람을 속이고, 그들이 약속한 바를 지키지 못할 때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각자는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기 집 문에 매달아 둔다. 포로는 오랫동안 잘 대접해주고,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보아 준다. 그리고 모두 모인 사람들 앞에서 포로를 칼로 쳐서 죽인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구워서 함께 먹고, 오지 않은 친구들에게 조각을 보낸다.나는 이러한 행동이 흉측하고 야만적인 행위인 것을 주목하며 언짢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잘못을 잘 비판하면서, 우리의 야만스런 행위는 주목하지 못하는 일이 슬프다. 나는 산 사람을 잡아 먹는 일이 사람을 죽여서 먹는 것보다 더 야만스럽다고 본다. 아직도 아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신체를 고문과 고통스러운 형벌로 찢고, 불에 달군 쇠로 지지고 개나 돼지에게 물어 뜯겨 죽게 하는 일이 사람을 죽인 뒤에 구워서 먹는 것보다 더 야만스런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도 알렉시아 시에서 카이사르에게 포외당했을 때에 늙은이, 여자들,그리고 싸움에 쓸모없는 다른 인간들의 시체를 이용해서 이 포위전의 기아상태를 지탱해 내려고 결정했던 것이다.

 

우리가 예사롭게 저지르고 있는 배신, 불성실, 포학, 잔인성등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의 법칙에 비추어서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와 비교해서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모든 야만성에서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더 심하기 때문이다.

적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케 하기 전에는 달리 진실한 승리는 없다. (클라우디아누스)

[몽테뉴수상록 1]

그들은 포로들에게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아주 자유롭게 취급한다. 그리고 대개 그들에게 장차 죽일 것이라는 위협과 그들이 당해야 할 고초,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준비하는 시설과 그들의 사지가 찢어질 것, 그들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향연등에 관해서 이야기 해준다. 이 모든 일은 단지 그들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유약하고 비굴한 말을 끌어내거나, 또는 도망갈 생각을 하게 해서 놀라게 하고 그들의 지조를 꺾었다는 만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 생각해 보면 역시 진실한 승리는 단지 이 점에 있기 때문이다.

 

헝가리인들은 대단히 호전적인 전사들이다. 그들은 적을 항복시키기 위한 목적 외에는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하지 않는다. 완전히 패했다는 고백을 얻고나면 그들은 적을 해치지도 않고 배상금도 받지 않고 놓아 보내며, 기껏해야 이후부터는 그들에게 대항해서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서약을 시키는 정도였다.


이 장에서의 식인종은 단순히 인간을 먹는 야만적인 행위의 식인종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그들이 식인 행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요즘 식인행위는 하지 않지만, 그것보다 더한 행위를 하는 우리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더 야만적이다라는 이야기다.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동물의 세계와 이들의 행동이 매우 비슷하다. 음흉한 뒷생각이 없다는 점에 매우 시원하다. 대자연과 함께 일때는 대자연의 속성과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기교를 부려 질서를 틀어 변경함으로써 우리의 속성은 대자연과 멀어진다. 그 순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달라진다. 대자연으로 돌아가 대자연의 속성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