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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1.우리 행동의 줏대없음에 대하여 外/몽테뉴수상록1

라미뉴 2020. 3. 12. 20:02

1. 우리 행동의 줏대없음에 대하여

 

결단성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천성에 가장 공통되게 명백한 악덕으로 나는 지각 있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둘러맞추려고 애쓰고 있는 꼴을 보면 언제나 이상한 생각이 든다. 고대를 통해 예지의 주요 목적인 줏대가 확고히 선 삶을 산 인간은 열두엇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건들은 바람처럼 휘몰아쳐 제멋대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자세 때문에 나 자신이 흔들리면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조심스레 이것을 관찰한 자는 자기가 두번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나는 뉘어 놓은 쪽에 따라서 내 심정을 어느 때는 이 모습으로, 어느 때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준다. 내가 나를 여러가지로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여러가지로 보는 까닭이다.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따라서 모든 모순이 생겨난다. 부끄럼을 타고 건방지고, 정숙하고 음탕하고, 수다스럽고 시무룩하고, 억세고 연약하고, 약고 얼빠지고, 울적하고 온후하고, 박학하고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고 정직하고, 관후하고 인색하고 낭비하는 이 모든 것을 나는 어느 점, 내가 보는 대로 알아본다. 누구든 세밀히 자기를 살펴 보는 자는 자기 속에, 자기 판단력 속에도 이런 변덕과 충돌이 잇음을 발견한다.


결단성이 없다는 것은 천성이고, 나에게는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았다. 일관되지 않고, 흔들림이 있으며, 상대에 따라 변하는 나의 행동이 순전히 나의 잘못이구나, 고쳐야 할 점이구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것이 한편으로 인간의 천성을 바꾸려는 헛된 노력이였구나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려는 순간, 아니다. 이것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대로의 나의 모습 중에서 항상 일관되게 변함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향하여 간다. 천성을 거슬러보자..

 

2. 술주정에 대하여

 

 

어떤 악덕이든 악덕인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런 것이 똑같이 악덕이긴 하지만 동급의 악덕은 아니다. 죄악의 서열과 정도를 혼동함은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술주정은 천하고 상스럽고도 짐승과 같은 악덕으로 보인다. 정신은 여기 낄 틈이 없다. 인간 최악의 상태는 자기 인식의 통제력을 잃은 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도액이 항아리 속에서 발효하여 바닥에 있는 모든 것을 위로 치밀어 올리듯, 술은 과음한 사람들에게서 그 속속들이 비밀까지 튀어나오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우리는 어떤 쾌락이건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얻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악덕은 다른 것보다 양심에 가책을 주지 않으며, 또 그것을 준비하기에 어려울 것도 없고, 얻어 보기도 힘들지 않다는 점에서 경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노령에 이르면 몸이 불편해져서 어디건 의탁하고 싶어지며 마실 것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 내가 이런 재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나하면 인생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배앗아 가는 마지막 쾌락인 까닭이다. 인간 천성의 열기가 몸의 중허리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거기에 박혀서 육체 생활의 유일하고 진실한 쾌락을 지어준다. 다른 쾌락은 거기에 비하면 잠자는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에는 그것이 올라와서 날아가는 김과 같이 열기는 목구멍에 도달하며 거기서 마지막 자리를 잡는다.

 

사람은 자기 성향을 제어하고 절제하기가 고작이다. 왜냐하면 천성을 극복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높게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떠나서 올라가며, 이로 재갈을 악물고 자기 육신을 빼앗아 너무 멀리 실어가며,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이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속의 열기이며 광증이라고 부른다. 그때문에 우리 고유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초월하는 모든 비약은 그것이 아무리 칭찬할 만하여도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이다.


술에 대한 표현 " 포도액이 항아리 속에서 발효하여 바닥에 있는 모든 것을 위로 치밀어 올리듯, 술은 과음한 사람들에게서 그 속속들이 비밀까지 튀어나오게 한다고 말한다." 아주 그럴싸한 표현이다. 바닥에 있는 것을 모두 튀어나오게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취중진담 이라는 말도 있는 것일게다. 술에 취해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 나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태, 광증, 그 말이 맞다. 나이가 들면서 술을 찾게 되는 이유가 나의 열기가 몸 중허리에서 목구멍에 도달함으써 마실게 필요하게 된다. 무릎을 탁 친다.

 

 

3. 케아 섬의 풍습에 대하여

 

 

자기를 경멸하고 미워함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자신을 경멸하며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성에 반하는 일이다. 그것을 질병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허영이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움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한다.

 


인간의 천성인 줏대없음에서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허영일까? 지금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허영'이라고 하니 이렇게 되고 싶다라고 해서 그 길을 향해 가는 나는 허영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이 장에서의 이야기는 거의가 자신이 택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의 구차하고 불명예스러우며, 미래의 어떤 욕심을 차단하기 위한 등 죽음으로써 명예스러워지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떻게 해야 이렇게 죽음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스스로 칼로 찌르고 그 안에서 내장을 꺼내는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몽테뉴는 죽음은 항상 내 옆에 있고, 자연사는 운이고, 죽음도 내가 입히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입히기가 힘들다. 지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죽음을 담대히 받아 들일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4. 사무는 내일로

 

 

내가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 자크 아미요 에게 영예로운 관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간결하고 소박한 언어 사용면에서 다른 작가들보다 탁월하며, 오랜 노력과 자기 학문에 대한 깊은 연구로 그렇게도 거칠고 난해한 작가를 아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어려운 구절들을 민첩하고 명쾌하게 풀어 나가면서도 원문에 억눌리지 않고, 평안하고 한가롭게 전개해 갈 때에 그의 문체는 더욱 유려해지는 듯 싶다.

 

나는 방금 플루타르크가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문장을 읽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기가 로마에서 글을 낭독하고 있는 자리에 루스티쿠스도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때에 황제가 보내 준 소포를 받고도 낭독이 끝나도록 뜯어 보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래서 좌중은 이 인물의 침착한 태도를 크게 찬양하였다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이야기는 마침 호기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말인데, 우리는 새 것에 대한 탐욕과 정열 때문에 새로 닥쳐오는 것만 너무 허둥지둥 조바심내며 상대하고, 우리 있는 자리가 어딘지 분간도 않고 사람이 가져오는 편지를 부산하게 뜯어 보느라고 좌숭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는 수가 많으니, 그가 루스티쿠스의 침착성을 칭찬한 것은 당연하겠다. 그리고 자기가 낭독하고 있는 도중에 그것을 중단시키려고 하지 않은 그 범절과 예의바름에 관한 칭찬을 거기에 덧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신중하다고 칭찬하는데는 의문을 품는다. 왜냐하면 그가 황제에게서 오는 우편물을 불시에 받고, 읽기를 미루다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반대되는 악덕은 무심함이다.


언어의 허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몽테뉴답게 간결하고 소박한 언어를 사용한 작가를 좋아하는구나... 나도 어려운 구절들을 민첩하고 명쾌하게 풀수 있었으면 좋겠다. 루스티쿠스의 이야기는 황제의 편지를 받고도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그의 범절과 예의바름에 대해 칭찬을 하고 있던 중 그 편지가 중요한 편지였을 경우라면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 그의 행동에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혼돈이 생긴다. 이런 줏대없음이 또 발동했다. 그렇다면 황제의 편지라는 사실로 허둥지둥하지 않고 플루타르크에게도, 좌중에게도 방해됨 없이 편지를 읽었으면 완전한 행동이 되었던걸까? 왜 이렇게 쉬운 것을 루스티쿠스는 안 한 거지? 무심함의 태도인가?